이스라엘 핵개발과 북의 핵개발
 
구미조은뉴스/ 편집인 / 윤영학

이스라엘 비밀 핵개발 秘話

北의 核미사일 實戰배치엔 이스라엘식으로 대응해야


글 :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 이스라엘, 프랑스와 공동으로 핵폭탄 개발, 南阿共의 핵무장 지원 代價로 중성자탄 실험 장소 구해
⊙ 역대 미국 대통령, 이스라엘 핵개발 알고도 덮어
⊙ 이란 핵개발 관련자 암살작전 진행 중, 북한 기술자도 표적 될 것
⊙ 한국도 자위적 핵무장 시급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의 디모나 핵(核)개발 기지.
  1956년 10월 말 프랑스 수상(기 모레)과 국방장관, 이스라엘의 수상(벤 구리온)과 국방장관(모세 다얀)이 파리 근교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두 국가 지도부는 영국과 프랑스가 관리하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國有化)한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을 상대로 3국(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공동작전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이스라엘이 먼저 이집트를 공격,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이 회담에서 또 다른 역사적 합의가 이뤄졌다. 프랑스가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의 디모나에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을 지어주고 우라늄을 공급해주기로 한 것이다. 디모나는 그 뒤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핵(核)무기 개발 기지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가능하게 한 이 합의는 이스라엘이 영국과 프랑스에 협조한 대가(代價)이기도 했다.
 
  영불(英佛)과 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격은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개입하는 바람에 전투에선 이기고 외교에선 지는 결과를 빚었다. 점령지를 내놓고 철수해야 했다. 이스라엘은 핵무장한 소련이 위협을 해오는데 핵무기를 갖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을 잊지 않았다.
 
  어느 나라든 핵무기 개발은 국가 지도부의 장기간에 걸친 계획과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직후부터 핵개발을 추진한다. 건국의 아버지 벤 구리온이 직접 핵개발을 지도했고, 서른 살에 국방부 국장으로 임명된 시몬 페레스(현 대통령)가 실무적으로 주도했다.
 
 
  이스라엘과 프랑스의 유착
 
1959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열린 독립기념일 퍼레이드를 참관하는 기 모레 프랑스 수상(가운데)과 골다 메이어(왼쪽). 모레는 이스라엘의 핵개발을 도왔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핵개발을 지원해줄 나라는 프랑스뿐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소련은 이스라엘에 무기 판매를 금지한 상태였다. 건국 직후 무기를 팔던 체코는 나세르가 정권을 잡고 친소(親蘇) 정책을 쓰자 이스라엘의 숙적(宿敵)인 이집트에 무기를 팔기 시작했다.
 
  4공화국 시절의 프랑스 국가 지도부는 2차 대전 중 반(反)나치 저항운동, 즉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나치의 대학살을 딛고 건국한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동정적이었다. 더구나 프랑스도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상태였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핵시설(원자로, 재처리, 폭탄 설계소)로 기술자를 파견했다. 수십 명의 이스라엘 과학자들이 프랑스 사람들과 같이 핵개발, 특히 핵폭탄 설계에 참여했다.
 
  두 나라 지도부는 인간적으로 친해졌다. 반나치 정서를 공유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비전과 열정이 프랑스 지도부를 감동시켰다. 이스라엘 핵개발의 실무 책임자 페레스는 급한 문제가 생기면 프랑스 각의(閣議)가 열리는 장소에 가서 프랑스 수상을 중간에 불러내 “회의에서 이 사안을 꼭 의결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수상은 이를 흔쾌히 승낙할 정도였다.
 
  프랑스-이스라엘의 협력관계는 전면적인 것이었다. 프랑스는 미라주 전투기 등 재래식 무기도 이스라엘에 팔았다. 두 나라의 과학자, 군인, 관료, 정치인들이 서로 협력관계를 맺었다. 1958년 알제리 독립문제로 프랑스가 혼란에 빠지자 군부(軍部)와 국민들의 열화(熱火)와 같은 요청에 의해 정계(政界)에 복귀, 수상이 된 드골(개헌 후엔 대통령)은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상호 유착이 너무 심한 데 놀랐다. 그는 원자력 담당 장관 장 자크 수스텔을 불러 협력중지 명령을 내렸다. 수스텔은 친(親)이스라엘 성향의 소유자였고 의회에 독자적인 지지기반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드골의 지시를 무시했다.
 
 
  한 번 핵실험으로 두 나라가 핵무장
 
이스라엘의 비밀 핵개발은 건국의 아버지 벤 구리온 수상(왼쪽)과 젊은 국방관료 시몬 페레스(오른쪽)의 합작품이다. 사진은 1956년 프랑스와 비밀협약을 할 때 찍은 사진이다.

  이스라엘은 핵개발을 비밀로 하기 위해 여기에 들어가는 자금은 국가예산 항목에 넣지 않았다. 미국의 유대계 부자들이 모금해 개발자금을 댔다.
 
  1957년 말 미국의 U-2 정찰기는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서 건설 중인 수상한 시설의 사진을 찍었다. 유명한 사진 분석가 디노 브루지오니는 프랑스의 핵무기 개발용 원자로와 똑같은 시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육상으로부터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이 공사장엔 많은 프랑스인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분석결과는 CIA에 의해 이듬해 초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이런 정보에 민감한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은 이 건에 대하여는 무심했다. 보고자에게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이런 보고는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백악관의 참모들도 친이스라엘 성향이 강해 비밀 핵개발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U-2기의 정찰비행은 계속되었으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1960년 2월 13일 프랑스령(領)인 알제리의 사하라 사막 지하에서 프랑스 최초의 지하 핵실험이 있었다. TNT 환산 6만5000t의 폭발력을 보였다. 대성공이었다. 핵전문가들은 이날의 핵실험으로 두 나라, 즉 프랑스뿐 아니라 이스라엘도 사실상 핵무장국이 되었다고 말한다. 프랑스의 핵기술을 이스라엘이 공유(共有)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핵실험 없이 핵(核)폭탄을 만든 것은 1966년으로 추정된다.
 
  프랑스의 1차 핵실험 직후 드골 대통령은 친이스라엘 성향의 원자력 장관을 밀어내고 이스라엘과의 협력관계를 정리하라는 확고한 지시를 내렸다. 당시 프랑스 원자력청의 청장이던 프란시스 페린은 나중에 인터뷰를 통해 1950년대에 프랑스와 이스라엘 팀은 공동으로 핵폭탄 설계를 했고, 2차대전 중 미국에서 입수한 기술을 근거로 연구했다고 털어놓았다.
 
  1960년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 수상은 파리로 가서 드골과 담판을 했다. 구국(救國)의 영웅과 건국의 아버지는 만나자마자 서로 통했다. 정부 차원에서 프랑스는 이스라엘의 핵개발에서 손을 떼지만 프랑스 기업은 기존 계약에 따라 협력을 계속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프랑스 회사들은 디모나 핵시설을 다 지어주고 떠날 수 있었다.
 
  드골이 이스라엘에 대한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을 최종적으로 금지시키는 것은 1967년 6월 전쟁 직후였다. 드골은 전쟁 직전 “어느 쪽이든 먼저 공격하는 나라를 응징하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알고도 덮어준 아이젠하워
 
이스라엘의 디모나 핵개발기지에 있는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

  1960년 선거에서 공화당의 닉슨 후보가 민주당의 케네디 후보에게 아주 작은 표차로 졌다. 정권 교대 작업이 진행 중이던 12월 18일 미국의 원자력위원회 존 매콘 의장은 <뉴욕 타임스> 기자에게 이스라엘의 비밀 핵개발 정보를 흘렸다. 그는 아이젠하워 정부의 이스라엘 감싸기에 분노하고 있었다. 국가안보회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디모나 프로젝트의 전모를 보고했다. 대규모 플루토늄 생산기지 건설에 1억 달러가 들었고 미국의 유대인 모금 및 외국원조 자금의 전용(轉用)이 있었다고 했다. 영국 정보기관은 그 전에 이스라엘이 노르웨이로부터 원폭 개발에 필요한 중수(重水)를 사들여간 사실도 밝혀냈었다.
 
  벤 구리온 수상은 1960년 12월 21일 의회 연설을 통해 처음으로 디모나 원자로 건설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평화적 목적의 사업이고, 이스라엘 전문가들이 주도한 공사라고 거짓말을 했다. 아이젠하워 팀은 케네디의 정권 인수팀에 정보를 넘기고 떠나면서 디모나 원자로가 곧 플루토늄 생산을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핵확산 금지에 관심이 많았다. 이스라엘 문제를 심각하게 취급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인 1961년 5월 벤 구리온 이스라엘 수상이 미국을 방문,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이스라엘은 담수화(淡水化) 사업과 값싼 전력(電力)을 얻기 위해 디모나 원자로를 짓고 있다’는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케네디 정부는 벤 구리온의 방미(訪美) 직전에 조사관 두 사람을 디모나 시설에 보냈다. 그 중 한 사람인 라비 교수는 이스라엘의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 이사였다. 와이즈만 연구소는 이스라엘 핵개발 기술자들을 양성한 곳이다.
 
  두 사람은 이스라엘측이 엉뚱한 설비와 구조를 보여주는 것을 믿고선(혹은 믿는 척하고선) “핵무기 개발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댈러스에서 암살된 사건은 이스라엘로선 일종의 횡재(橫材)였다.
 
 
  地下핵실험 없이 핵무장
 
  후임 존슨 대통령은 유대계 인사들로부터 많은 정치자금을 거둔 이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핵개발에 눈을 감았다. 1963년 12월 드디어 디모나의 원자로가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 한 달 뒤 이스라엘은 미국의 원자로 기술자 세 명을 디모나로 초빙, 시설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도착 직전 이스라엘은 가짜 통제실을 만들었다. 미국의 순진한 세 기술자에게 이스라엘은 원자로를 보여주지 않고 가짜 통제실만 시찰하게 했다. 세 기술자는 미국과 이집트에 “디모나 시설은 핵무기를 만들 능력이 없다”고 보고했다.
 
  이스라엘은 원자로의 원료인 우라늄 원광(原鑛)을 프랑스로부터 수입하다가 나중엔 아르헨티나와 남아프리카에서 ‘옐로케이크’(원자로용으로 정제된 우라늄)를 사들였다. 1965년 이스라엘은 미국의 유대계 기업인 잘만 샤피로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원자로에서 나오는 물질의 처리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90kg의 농축우라늄을 빼돌려 이스라엘에 건네주었다. 우라늄 핵폭탄 10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 샤피로는 형사처벌도 받지 않았다. 존슨 행정부 시절 주(駐)이스라엘 대사 바부르는 대통령으로부터 이런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라. 그들을 만족시켜 주라.”
 
  1968년 벨기에 브뤼셀의 한 창고엔 수백 톤의 우라늄 원광이 들어 있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회사로 위장, 이를 수입하기로 했다. 원광을 실은 터키 화물선은 안트워프 항구를 떠나 공해(公海)로 나온 뒤 이스라엘 배에 원광을 옮겨 실었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와 공동연구를 한 경험이 있어 지하(地下)핵실험을 하지 않고 핵폭탄을 만들었다. 1966년 가을에 네게브 사막 지하에서 핵폭탄 모형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 전문가들은 이때 이미 이스라엘은 수소(水素)폭탄과 중성자탄(中性子彈)을 개발하고 있었다고 본다. 1967년 6월 전쟁 때는 이스라엘이 두 개 정도의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나세르가 6일 전쟁을 시작한 데는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핵무장을 하기 전에 끝장내야 한다는 강박심리가 작용했다. 6일 전쟁은 이스라엘 전투기가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추어 이집트 공군기지를 기습, 300대가 넘는 전투기를 활주로와 격납고에서 파괴함으로써 사실상 30분 만에 끝났다.
 
 
  리버티호 격침의 미스터리
 
  6일 전쟁 중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1967년 6월 8일 미 해군 6함대 소속 정보수집함 리버티호가 이집트 연안 공해상에서 이스라엘 전투기의 폭격과 어뢰정의 공격을 받고 침몰, 34명이 죽고 172명이 다쳤다. 공격을 받자 리버티호의 함장은 미(美) 항모(航母) 아메리카호에 지원을 요청했다. 아메리카호 함장은 즉시 A-4 전투기를 발진시킨 다음 가이스트 6함대 사령관에게 보고, 사령관은 출격을 승인했다.
 
  직후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출격중지’를 명령했다. 사령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최고사령관(대통령)의 육성(肉聲) 명령이 없으면 중지시킬 수 없다”고 버티었다. 존슨 미국 대통령이 그의 전화를 받더니 “장관 명령대로 하라”고 했다(레이건 정부 때 공군장관을 지낸 토머스 C. 리드가 쓴 <核급행>에서 인용).
 
  이스라엘은 오폭(誤爆)이라고 변명했으나, 리버티호가 이스라엘군의 작전계획을 탐지해 시리아에 넘겨줄까봐, 격침시켰다는 설(說)이 있다. 라빈 이스라엘군 참모총장은 이스라엘 공군기가 격침시킨 배가 소련 함정이 아니고 미군 함정이란 보고를 받곤 안도했다고 한다. 소련 함정이었으면 군사적 보복을 각오해야 하는데, ‘다행히’ 미군 함정이므로 존슨 행정부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자신감 뒤엔 미국의 유대인 세력이 존슨 대통령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존슨 행정부는 리버티호 격침 사건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존슨 대통령을 이은 닉슨도 친이스라엘 노선을 따랐다. 그는 대통령 선거와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뒤 이스라엘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스라엘 지도부는 닉슨을 끝난 사람으로 취급, 홀대했는데 당시 참모총장이던 라빈 장군이 닉슨을 부대로 초청, 환대했다. 라빈은 6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 되었고 주미(駐美)대사로 부임했다. 닉슨은 라빈을 우대했다. 6일 전쟁으로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로부터, 골란 고원을 시리아로부터 빼앗은 이스라엘은 두 나라를 상대로 저강도(低强度)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1969년 9월 골다 메이어 수상이 미국을 방문, 닉슨과 회담했다. 메이어 수상은 25대의 팬텀기, 80대의 스카이호크 전투기, 그리고 2억 달러의 저리(低利) 차관을 요청했다. 닉슨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런 평을 했다.
 
  <메이어 여사는 극단적인 강고(强固)함과 극단적인 친밀감을 동시에 표현할 줄 알았다. 이스라엘의 생존과 관련된 사안에 대하여는 굉장히 강고한 태도를 보였다.>
 
 
  닉슨-메이어 비밀협약
 
1969년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수상(왼쪽)과 닉슨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핵개발을 묵인하는 밀약을 맺었다.

  이 회담에서 두 나라는 비밀협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 공식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91년 이스라엘 언론에 의해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졌고, 당시 닉슨의 안보보좌관이던 키신저의 메모가 비밀해제로 공개된 적이 있다. 비밀협약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공개적 선언이나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의 보유를 알리지 않으면 미국은 이스라엘의 핵 사업(Nuclear Program)을 묵인하고 보호할 것이다”로 되어 있다.
 
  작년 7월 6일 오바마 대통령은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한 직후, “이스라엘은 독특한 안보상의 필요성에 따라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해 안보상의 이익을 저해하는 어떤 조치도 취하도록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고 발표했다. 이는 1969년의 비밀협약이 유효함을 에둘러서 표현한 것이다.
 
  메이어-닉슨 비밀협약에 따라 이스라엘은 핵보유를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고, 핵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켜야 하게 되었다. 플루토늄으로 만든 핵폭탄은 정밀한 내폭(內爆)장치를 필요로 하므로 핵실험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와 공동으로 핵폭탄을 설계, 실험한 셈이므로 이 단계는 필요하지 않았다. 농축우라늄으로 만드는 핵폭탄은 분리된 우라늄을 임계(臨界)질량 이상으로 합치기만 하면 터지게 설계되어 있어 별도의 핵실험이 필요하지 않다. 북한정권이 이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수소폭탄이나 중성자탄은 핵실험이 필요하다. 1973년 10월의 제4차 중동전쟁 때 혼이 난 이스라엘은 중성자탄 개발에 착수했으므로 핵실험장이 필요했다. 여기서 남아프리카가 떠올랐다.
 
 
  이스라엘-남아공의 核 커넥션
 
  1974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골다 메이어 수상이 물러나고 라빈이 수상, 페레스가 국방장관이 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페레스는 ‘프렌치 커넥션’으로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성사(成事)시킨 사람이다. 그는 국방장관이 되자 남아공(南阿共)에 눈을 돌린다. 남아공은 인종분리 정책 때문에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국내에선 흑인들의 무장 반란이 일어나고, 이웃나라에선 친소 세력이 등장, 쿠바와 북한군을 불러들였다. 국내외로 불안이 증폭되자 남아공 정부는 체제유지를 위해 핵무장을 결심하게 된다. 남아공은 우라늄 매장량이 많았다. 농축우라늄 방식에 의한 핵폭탄 개발에 착수한 것이다.
 
  1974년 페레스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남아공의 존 볼스터 수상을 비밀리에 만났다. 여기서 핵개발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그 내용은 공개된 게 없으나 이스라엘은 핵무기 관련 기술을 포함한 군사기술과 장비를, 남아공은 우라늄 원광과 핵실험 장소를 제공하기로 합의했을 것이다. 1974년 여름 두 나라는 수교(修交)하고 대사를 교환했다. 1976년 3월 페레스는 남아공을, 볼스터는 이스라엘을 방문, 핵기술 교류를 촉진시켰다.
 
  이스라엘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얻은 교훈에서 중성자탄의 개발을 전략 목표로 설정했다. 이스라엘은 기습을 당할 경우, 자국(自國) 영토에서 핵폭탄을 써야 하는 상황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경우 중성자탄을 쓰면 적(敵)의 탱크부대 같은 집단 목표에 중점적인 타격을 주고 다른 시설물에 대한 피해를 줄일 수 있다.
 
  1976년 소련은 남아공의 핵개발 계획을 탐지, 미국에 대해 공동으로 발린다바의 농축우라늄 시설을 공습하자고 제의했다가 거절당했다. 1978년 1월 발린다바 시설은 무기용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대서양에서 중성자탄 실험
 
  1979년 9월 22일 지구를 돌고 있던 미국의 인공위성 벨라는 남아프리카 남단(南端)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2000km 떨어진 프린스 에드워드 섬 근처에서 일어난 폭발 장면을 촬영했다. 아센션 섬에 있던 미 해군의 음파탐지기도 같은 시간에 폭발음파를 관측했다. 푸에르토리코에 있는 세계최대의 전파 망원경도 이상한 전자파를 잡았다. 이스라엘과 파키스탄 및 북한 등의 비밀 핵개발을 다룬 <핵 급행>의 공동 저자(著者) 댄 스틸만은 뉴멕시코의 로스앨러모스 핵폭탄 연구소 기술정보 담당 국장이었다. 1979년 어느 날 그는 다른 일로 CIA의 원자력 국장 잉글레이 박사를 만났다.
 
  박사는 광선 분석 자료를 내놓으면서 스틸만의 의견을 구했다. 평생 핵실험 자료를 접했던 스틸만은 즉석에서 “대기권 핵실험의 흔적이다. 틀림없다”고 대답했다. 잉글레이 박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스틸만은 “핵실험 이외의 가능성은 없다”고 확인했다.
 
  미국 정부는 9월 22일의 폭발이 핵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한번도 공식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이를 인정할 경우 미국은 이스라엘에 제재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그럴 배짱이 없었다. 사실은 정책을 위해 희생되었다.
 
  이스라엘도, 남아공 정부도 침묵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이 컨테이너에 넣은(음파 교란 목적) 작은 중성자탄을 바지선에 실어 폭파시켰다고 본다. 태풍이 부는 시기를 골라 터트린 것은 방사능이 바다로 쓸려나가 사라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디모나 핵시설에서 일했던 기술자 바누누는 1986년에 한 폭로에서 1984년부터 이스라엘은 중성자탄(中性子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남아공 정부는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아 1983년부터 우라늄 방식의 핵폭탄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름이 60cm, 길이가 180cm인 폭탄의 무게는 약 1t이었다. 이 핵폭탄은 이스라엘과 공동으로 개발한 중거리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었다. 1989년까지 남아공은 약 400kg의 농축 우라늄과 여섯 개의 우라늄 폭탄을 제조했다.
 
  남아공을 둘러싼 정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냉전(冷戰) 종식, 앙골라에 배치됐던 쿠바군의 철수, 인종분리 정책의 재검토, 만델라와 정권 이양 협의 등. 1989년 남아공 백인주민은 클레르크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핵시설 및 폭탄의 해체를 명령하고, 1990년에 옥중(獄中)의 만델라를 석방했다. 백인정부가 핵무장 폐기를 결심한 것은 만델라가 영도할 흑인정부에 핵폭탄을 넘기기 싫었기 때문이란 해석도 있다.
 
  클레르크는 1993년 3월 24일 국회에서 한 보고를 통해 핵개발에 약 4억 달러가 들었다고 했다. 그는 어떤 외국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물론 거짓말이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이스라엘-남아공 커넥션이 끝났다. 남아공은, 일단 핵무장을 했던 나라가 국내외의 정세 변화에 적응, 핵을 포기한 유일한 사례이다.
 
 
  영국의 언론재벌이 모사드 협조자
 
영국의 언론재벌로 모사드의 협력자였던 로버트 맥스웰.

  1980년대에 영향력의 절정기를 맞았던 영국의 언론 재벌 로버트 맥스웰은 체코에서 출생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가족을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잃었다. 영국군에 들어가 장교가 된 그는 이스라엘이 건국하자 체코가 이스라엘에 무기를 대주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스라엘은 건국하자마자 아랍국가들과 전쟁에 돌입하는데, 체코제(製) 무기 덕분에 이길 수 있었다.
 
  1980년대 그는 《데일리 미러》, 《선데이 미러》, 《데일리 레코드》, 《선데이 메일》 같은 신문사와 출판사 및 텔레비전 방송국을 소유, 영국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노동당 국회의원도 두 차례 지냈다.
 
  1984년 맥스웰은 이스라엘 핵개발의 대부(代父)이기도 한 당시 수상 시몬 페레스(현 대통령)를 만난 뒤 해외정보기관 모사드의 적극적인 협조자가 되었다. 페레스는 모사드 부장 나훔 아드모니를 맥스웰에게 직접 소개해 주었다. 맥스웰은 거물(巨物) 언론인으로서 세계의 지도자들을 쉽게 만나고 다니면서 고급 정보를 수집, 모사드에 전해준다.
 
  1986년 9월 14일 맥스웰은 모사드의 아드모니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디모나 핵시설에서 근무했다는 한 기술자가 대리인을 통해 자신이 소유한 신문사 《선데이 미러》에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해 왔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핵시설 사진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기술자의 이름은 디모나에서 9년간 근무한 적이 있는 모로코 출신의 유대인 모르데차이 바누누.
 
  아드모니 부장은 페레스 수상에게 직보(直報)했다. 모사드가 바누누의 행적을 조사하니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바누누는 핵무기를 제조하는 시설까지 볼 수 있는 보안허가증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당시 핵폭탄을 수백 개나 보유하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론 ‘핵에 대하여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NCND)다’는 모호성을 핵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있었다. 이 모호성 덕분에 이스라엘은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핵 강국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폭로가 이뤄지면 이 모호성과 유연성이 깨진다.
 
  이스라엘 정부는 비상대책반을 구성했다. 바누누를 암살하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납치로 결정됐다. 모사드는 바누누가 《선데이 타임스》와도 접촉을 하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들은, 로버트 맥스웰을 동원, 선수를 쳤다. 사주(社主)인 맥스웰의 지시로 《선데이 미러》는 바누누가 제공한 정보는 가짜로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核정보 폭로자 납치 작전
 
이스라엘의 핵정보를 폭로했던 모르데차이 바누누.

  《선데이 타임스》는 기사를 쓰기 전에 영국의 핵전문가를 바누누와 만나게 해 정보의 진위(眞僞)를 확인하게 했다. 그 결과는 ‘진짜’였다. 선데이 타임스는 바누누를 보호하기 위해 마운트바텐 호텔에 투숙시켰다. 모사드는 런던에 사는 협조자들을 동원, 바누누의 거처를 알아내곤 미인계(美人計)를 쓰기로 했다. 모사드의 여성 첩보원 세릴 벤 토브가 동원되었다. 그는 결혼한 상태에서 이 작전을 자원했다.
 
  9월 24일 바누누는 늘 따라다니는 《선데이 타임스》 기자를 따돌리고 호텔 바깥으로 산책을 나갔다. 타임스 기자는 그를 몰래 미행했다. 기자는 바누누가 라시세스터 광장에서 한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목격했다. 금발의 미녀였다. 유대인 냄새가 났다.
 
  호텔로 돌아온 바누누는 《선데이 타임스》 기자에게 “신디라는 미국 여자를 만났다”고 했다. 기자가 “당신이 그 여자를 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고 계획된 것 같다”고 경고했지만 바누누는 듣지 않았다. 모사드 첩보원 세릴은 훈련받은 대로 첫눈에 바누누를 사로잡은 것이다.
 
  며칠 뒤 공작원 ‘신디’는 로마에 사는 여동생을 만나러 가자고 바누누를 설득, 로마행(行) 비행기에 올랐다. 이 여객기엔 다섯 명의 모사드 요원이 동승(同乘)했다. 로마 공항에서 신디와 바누누는 택시를 타고 신디의 여동생이 산다는 아파트로 갔다. 세 명의 모사드 요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바누누를 끌어들여 마취시켰다. 요원들은 바누누를 들것에 실어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선 구급차에 옮겼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켜보는 이웃사람들에겐 “친척인데 갑자기 발병(發病)했다”고 설명했다.
 
  바누누를 실은 차는 해안으로 달려갔다. 작은 배에 옮겨진 바누누는 먼 바다에서 기다리던 이스라엘 화물선으로 다시 옮겨졌다. 사흘 후, 바누누를 납치한 요원들은 이스라엘의 하이파항(港)에 도착했다. 《선데이 타임스》는 10월에 바누누의 폭로를 기사화했다. 이스라엘이 적어도 100개의 핵폭탄을 갖고 있다고 썼다.
 
  바누누는 간첩죄로 1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1년간 독방에 감금되었다. 국제여론이 나빠지자 1998년에 좀 좋은 방으로 이감(移監)되었다. 그는 2004년에 석방됐으나 이스라엘 당국은 엄격한 제한 조치를 취했다. 출국은 금지되고 외국인을 만날 수 없으며, 항구와 공항에 접근할 수 없게 했다. 전화도, 인터넷도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 규정을 어기면 석방조건 위반으로 수시로 잡아 가둔다.
 
  1991년 11월 5일 로버트 맥스웰은 카나리아 군도 근해를 항해중이던 자신의 호화요트에서 바다로 떨어져 죽었다. 실족사(失足死)로 발표되었으나 자살이란 설과 모사드에 의한 암살이란 설도 있다. 사고 직전 한 전직 모사드 요원은 미국에서 발간한 책을 통해 맥스웰과, 《데일리 미러》의 외신부장 닉 데이비스를 모사드 요원이라고 지목했다. 《데일리 미러》는 맥스웰이 모사드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실었다. 맥스웰은 이스라엘에 묻혔는데 국장(國葬)에 버금가는 장례식이었다.
 
 
  이란 핵 과학자 암살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위해 수퍼 건을 개발하려다가 모사드에게 암살당한 제럴드 불.

  바누누 납치 사건은 이스라엘이 자국(自國)의 핵 정보를 보호하려는 필사적 의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핵무기는 포기하지 않으면서 중동 이슬람 국가가 핵무기를 갖는 것은 반드시 저지한다는 방침도 확고하다.
 
  연평도 도발로 동북아(東北亞) 정세가 긴장되어 있을 때인 지난해 11월 29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선 연쇄 암살 시도가 있었다. 핵(核)물리학자인 마지드 샤리아리는 부인과 경호원을 태운 푸조 승용차를 몰고 출근 길 정체(停滯)가 심한 시내(市內)를 달리고 있었다. 이때 오토바이 한 대가 옆에 오더니 푸조 문짝에 무엇인가를 붙이고 사라졌다. 직후 차는 폭파되었다. 샤리아리는 즉사(卽死)하고 다른 탑승자들은 중상(重傷)을 입었다.
 
  몇 분이 지난 테헤란의 주택가, 또 다른 핵물리학자인 아바시 다바니가 탄 차 옆에 오토바이가 따라붙었다. 다바니는 이란 혁명수비대 소속으로서 유엔 안보리의 대(對)이란 제재결의문에 ‘핵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관계하는 인물’이라고 특정된 사람이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차체(車體)에 무엇인가를 붙이는 것을 본 다바니는 차를 세우고는 타고 있던 부인을 끌어내렸다. 그 직후 차가 폭발했다. 다바니는 목숨을 건졌다.
 
  작년 1월엔 핵개발에 종사하는 이란 과학자 마수드 알리 모하마디가 같은 방법으로 암살됐다. 이스라엘이 일련의 암살작전에 관련됐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에게만 보복을 하는 게 아니다. 적국(敵國)의 핵, 미사일, 신형 대포 등 신무기 개발에 종사하는 과학자에 대하여도 국적(國籍)을 묻지 않고 암살을 해온 경력이 있다.
 
  1980년 6월 이스라엘의 해외정보기관 모사드의 암살팀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에 협조하는 이집트인 핵전문가 예히아 엘 마샤드를 파리의 한 호텔에서 발견했다. 발견 당시 암살팀은 총기를 갖지 않았다. 그들은 마샤드가 투숙한 방으로 들어가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옆방에 있던 창녀(娼女)는 경찰에 자신이 들은 소란에 대해 증언한 직후 뺑소니로 위장한 교통사고로 살해되었다.
 
  1980년대, 후세인의 이라크 정권은 캐나다 출생으로 벨기에서 활동하던 기술자 제럴드 불과 ‘수퍼 건’ 제작 계약을 맺었다. 사정(射程)거리가 수천 km나 되는, 핵폭탄을 쏠 수 있는 대포(大砲)를 만든다는 구상이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이 대포 제작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1990년 3월 모사드의 암살단이 벨기에 브뤼셀의 한 아파트 문을 노크했다. 제럴드가 문을 열자 다섯 발을 쏴 죽였다. 그들은 제럴드의 시신(屍身) 사진을 찍어 대포제작에 관계하는 유럽 기술자들에게 이런 글과 함께 보냈다.
 
  <비슷한 운명을 맞지 않으려면 내일부터 일하러 가지 말라.>
 
  이스라엘은 북한정권을, 이란의 핵 및 미사일 개발을 지원하는 적으로 간주한다. 북(北)의 핵 및 미사일 개발에 종사하는 요인(要人)들도 모사드의 암살 리스트에 올라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암살과 보복의 경력이 화려하지만 민주국가이다.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가 매년 발표하는 국가별 자유도(自由度) 랭킹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나라’로 분류된다. 민주주의는 정치에 적용되는 원칙이지 국방과 안보를 민주적으로 할 순 없다. 국가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안보 전선에선 자위(自衛)의 원칙이 가장 유효하다.
 
 
  核미사일 실전 배치라는 악몽
 
  북한정권이 핵폭탄을 소형화(小型化), 장거리 미사일에 장착, 실전(實戰)배치함으로써 한국의 생존을 위협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우라늄농축 시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핵무기 양산(量産)체제를 갖출 것이고 북한은 핵강국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북이 천안함 폭침(爆沈)과 연평도 도발 같은 사건을 일으켜도 핵무기를 갖지 못한 한국군은 응징을 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한국의 종북(從北)세력은 북이 도발해도 “무저항주의로 나가야 한다”면서 한국을 북에 종속시키려 할 것이다. 종북세력이 정치와 언론을 장악한 상태에서 북한군이 기습남침, 서울을 포위하고 “현 위치에서 휴전하자. 불응하면 핵무기를 쓰겠다”고 위협할 때 국가지도부가 과연 결사(決死)항전을 결단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한미(韓美)연합사가 해체되는 2015년 후라면 미국이 한국을 위해 핵전쟁을 각오하고 핵무장한 북을 무력(武力)응징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핵무장한 북한정권은 남침(南侵)을 하더라도 반격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한미연합군이 휴전선을 넘어 반격을 시작하면 핵무기를 쓰겠다고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북의 핵개발을 막지 않았고 사실상 지원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耀) 전 수상은 “북한이 미·중(美中)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중국은 일본이 핵무장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북의 핵무장을 막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중국이 주도한 6자회담은 이미 국제 사기극으로 드러났다.
 
  우리 정부는 아직도 6자회담에만 기대를 걸고 ‘대화를 통한 해결, 평화적 해결’을 주문 외듯 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북한이 ‘핵미사일 실전배치’를 향한 초읽기에 들어간 위기상황에서도 ‘복지 포퓰리즘’만 노래하면서 딴 나라 일처럼 구경만 한다.
 
  적이 핵무기를 가졌는데도 자위적 차원의 핵개발을 해야 한다는 움직임조차 생기지 않는 곳은 지구상에서 한국뿐이다. 미국이 제공한다는 핵우산은 북의 핵무장에 의해 이미 ‘찢어진 우산’이 되었다. 핵무장을 막지 못한 핵우산은 우산이 아니다. ‘찢어진 우산’에 5000만 국민의 생존을 맡길 수 있는가.
 
 
  外注국방?
 
윤용남 전 합참의장.

  북한정권을 무너뜨리든지, 북핵(北核) 시설을 폭격하든지, 공개적으로 대응(對應)핵무장을 하는 수밖에 없다. 안보를 외국이나 국제사회에 의존하는 나라는 독립국가가 아니다. 조갑제닷컴(chogabje.com)의 인터넷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대응핵무장에 찬성하는 여론이 99%였다. 핵확산금지조약(NPT)도 ‘핵문제와 관련된 비상사건이 자국의 최고이익을 위태롭게 한다고 판단한다면 본 조약으로부터 탈퇴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자신을 지키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든지 안보문제에서 적의 눈치를 보는 자는 노예이다. 중국과 북한이 핵무장을 배경으로 한국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을 편드는 종북세력을 방치하는 나라는 자살을 결심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국민행동본부는 신문광고를 통해 <전범(戰犯)집단의 핵 미사일 실전배치를 저지하기 위해 국민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국방까지 미국에 외주(外注)를 주고 웰빙에만 탐닉할 것인가? 살찐 돼지 같이 살다가 야윈 늑대에게 잡혀먹힐 것인가?>라고 호소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지냈던 윤용남(尹龍男) 예비역 대장은 인터넷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만 믿고, 북한이 핵무기를 투발(投發)할 징후가 있으면 선제 타격할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선제 타격을 할 수 있을까? 누가 징후를 자신 있게 확증(確證)하고 신속하게 타격을 결심해 통수권자에게 건의할 것이며, 통수권자는 즉각 시행을 명령할 수 있을까?>
 
  그는 “재래식 무기만 가진 군대가 핵무기를 가진 적과 과연 전쟁이 가능할까?”라고 질문한다. “한미연합사의 해체로, 미국의 지원여부(與否)도 불투명한 상태에서 북한의 핵무기 투발 위협에 대해 미국이 일전불사(一戰不辭)의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라고도 했다.
 
  윤 장군은 “하루빨리 미국과 협력해 미국의 전술(戰術) 핵무기를 이 땅에 재배치하든지 그것이 안되면, 국민 여론을 고조시켜 경제가 다소 어려움을 겪더라도 나라의 명운(命運)을 생각해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 보유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도 안되면, 북한이 핵무기를 실전 배치하기 전에 죽기를 각오하고 폭파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세계 최빈국(最貧國)인 북한의 핵무장 위협에 언제까지 불안하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했다.
 
 
  현상유지의 달콤한 생활을 끝낼 때
 
  한미 FTA 협상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던 김현종(金鉉宗) 전 통상교섭본부장·유엔대사(현 삼성전자 해외 법무담당 사장)는 최근에 펴낸 책 《김현종, 한미 FTA를 말하다》(홍성사)에서 이렇게 썼다.
 
  <백악관에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오찬 시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많은 사람이 잘 모르지만 미국과 중국은 생각보다 가까운 관계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큰 나라 간에는 크게 타협할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큰 나라들의 의도를 잘못 해석하고, 여기에 휘말려 국익(國益)을 훼손시키는 일이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 미사일과 핵무기, 화학무기, 장사정포 등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능력을 강화하고, 일본과 중국의 군사력에 대한 최소한의 억지력도 확보해야 한다. 현상유지의 지속은 달콤하겠지만, 그 끝은 우리나라와 민족의 약화 내지 소멸로 나타날 것이다.>
 
  북의 핵미사일 위협에 관한 대응조치란 한국의 핵무장밖에 없다. 한 전직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대통령이라면 행정복합도시를 건설할 때 지하도시를 만들고 여기에 비밀 핵시설을 두어 단기간에 핵폭탄을 제조할 것이다. 그런 다음 북한정권에 대해 ‘장난감 같은 핵무기로 우리를 협박하지 말라’고 하고 주변국에는 ‘우리는 핵무기를 포기할 생각이 있다. 다만 북한도 동시에 핵을 포기해야 한다’고 선언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북핵 문제를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 미국의 힘을 빌려 북핵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건 노예근성이다. 미국의 협력을 받아 핵무장을 할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아프간에 1개 연대나 여단병력을 보낸 뒤 오바마 대통령에게 ‘재처리 시설을 갖도록 해 달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한국에선 정신병자 취급을 하는 풍토이지만 이스라엘에선 상식일 것이다.”
 
  우리는 시간이 없다. ‘북한의 핵미사일 실전배치’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현상유지란 달콤한 생활도 끝낼 때가 되었다.
 
출처 - 조갑제 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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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1/28 [15:45]  최종편집: ⓒ 구미조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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